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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테이블/식탁 에세이

소풍이 먼저냐? 김밥이 먼저냐?

전날 만들어둔 김밥 재료로 후다닥 도시락을 만들어서 산책겸 소풍을 나가는 주말 아침.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은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이라고 한다.

영국에서 비가 오지 않는 맑은 주말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어, 그럼 소풍 가야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냉장고로 달려가 무슨 재료들이 있는지 냉장고 안을 찬찬히 스캔을 한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여러 메뉴들이 홀로그램처럼 회전해서 돌아가기 시작하고 잠시 했던 메뉴 고민은 '소풍엔 역시 김밥이지'로 마무리가 된다. 

 

K-열풍 덕분에 이제는 런던 시내에서도 쉽게 한국 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집 근처에도 한국 슈퍼와 한국 테이크어웨이 식당도 있어서 언제든 편하게 김밥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야 김밥이 패스트푸드처럼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 된 지 오래지만, 영국에서 제대로 된 김밥을 먹으려면 손수 만들어 먹는 수 밖에는 없어서 김밥이 먹고 싶으면 소풍이든 손님 초대든 이벤트를 일부러 만들어서 비장하게 재료 준비를 하고 김밥을 싸서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 최근의 한국과 한국음식의 달라진 위상이 가져온 이런 변화와 편리함은 오랜 시간 해외 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서 조금 과장해 표현하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쉽게 김밥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음에도 냉장고에 뭔가 넣을만한 재료가 있으면 약간의 재료만 추가해서 간단한 버전의 집 김밥도 여전히 만들어 먹고 있는데, 그렇게 대충 만들어 먹는 김밥도 맛있는 걸 보면 내가 어지간히 김밥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 김밥에는 단순히 맛이나 편리함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편안함과 향수를 자극하는 기억을 담고 있어서 인 것 같다. 

나는 급식 세대가 아니다 보니 도시락은 우리 또래 친구들의 어머니들에게는 매일 해야만 하는 숙제였을 거다. 회사를 다니면서 도시락을 챙겨 다녀본 적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간단하게 한다고 해도, 매일 도시락을 싸는 게 신경이 많이 쓰이고 귀찮은 일이라는 걸 잘 안다. 

우리 집 같은 경우만 해도 매일 언니 둘의 점심, 저녁도시락(야간 자율학습)과 나와 동생의 도시락, 그리고 가끔은 아빠의 도시락까지 싸셔야 했으니 동생이 급식을 시작할 때까지 엄마는 매일 아침 전쟁을 치르셨을 거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김밥은 당연히 소풍날이나 되어야 먹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소풍날 아침이면 엄마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등장하는 엄마처럼 김밥으로 탑을 쌓곤 하셨다. 아침의 조금은 부산스러운 분위기와 전날 슈퍼에서 직접 고른 소풍 간식거리를 내 가방에 챙겨 넣으면서 산처럼 쌓은 김밥을 보고 있으면 소풍을 가기 전에 마음은 이미 들뜰 대로 들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간 소풍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소풍 점심시간까지 기다리다 먹는 도시락은 당연히 소풍의 하이라이트였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도시락을 펼쳐놓고 서로 김밥과 간식도 구경도 하고 함께 나눠먹고 했던 그런 기억들이 하나의 패키지처럼 묶여있는 게 나에게는 소풍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맑은 날이면 김밥이 먹고 싶어서인지 소풍을 가고 싶어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미 마음은 김밥 한 줄을 손에 달랑 들고서 강변으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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