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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테이블/식탁 에세이

미역국, 지금은 좋아!

어린 시절의 나에게 미역국이란 싫은 이유를 수 없이 들 수 있는 음식이었다. 

미끌거리는 식감과 흐물흐물하고 시커먼 미역의 생김새는 아무리 음식 솜씨 좋은 엄마가 맛있게 끓여주신다고 해도,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는 음식이었다. 

생일이면 마지못해서 몇숫가락 먹는 시늉만 겨우 하곤 했는데, 식구가 여섯 명이나 되는 우리 집에서 한 두 달 건너 가족 중 누군가의 생일 이어서, 엄마의 만만한 메뉴라는 이유로 식탁에 자주 올라오다 보니 싫고 피하고 싶지만 계속 봐야만 하는 직장 동료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렇게 싫은 사람은 자주 보면 더 싫어진다는 웃지 못할 농담처럼 미역국은 점점 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으로 굳어져 가고, 앞으로 내가 굳이 찾아 먹거나 만들어 먹지 않을 음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의 기호란 것도 결국엔 바뀌는 것이어서 그렇게 '절대' 좋아하지 못할 것 같던 미역국을 지금은 무척이나 좋아한다. 

미역국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함께 살게 되고, 또 한국음식이 귀한 해외에서 살다 보니 그렇게도 싫던 미역 건더기를 국그릇 한가득 담아서 먹는 건 기본이고, 지금은 소고기 외에도 다른 재료를 넣어가며 다양하게 만들어 먹고 있다.

심지어 이 맛있고 건강에도 좋은 음식을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싫어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예전엔 좋았지만 지금은 싫은 것들. 지금은 좋지만 또 언젠가는 바뀔지도 모르는 것들. 그게 단순히 취향이나 식성일 수도 있고, 어떤 물건이나 장소일 수도 또 오랜 인간관계일 수도 있다. 

 

나에게 미역국을 좋아하는 동거인이 '변수'가 된 것처럼 모든 것에는 그것에 대한 기호, 생각이나 태도를 바꾸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변수'나 '계기'같은 게 갑작스럽게 우연이든 필연이든 생길 수 있다. 

그러니 무엇이든 너무 쉽게 단정적으로 말할 필요도 너무 고집스럽게 우길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사 표현은 분명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극혐', '죽어도 싫은'같은 극단적인 부정의 말보다는 '(혹시나 좋아질 수도 있는, 하지만 지금은) 선호하지 않는, 좋아하지 않는 것' 정도면 좋지 않을까? 

 

살면서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사람을 만날지 모르고 거기서 내가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까

 

보통 아침은 간단히 요거트나 오트밀, 과일로 먹지만 생일 아침 만큼은 미역국에 밥을 먹어줘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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