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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테이블/식탁 에세이

포모도로 파스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이탈리아 여행중에 만들어 먹었던 원팬 토마토 파스타. 추운날이어서 스프처럼 먹을 수 있게 소스를 넉넉하게 만들었다.

 


* 포모도로 파스타 레시피는 에세이 글 하단에 있습니다.

조금 과장을 하면 이제는 파스타를 라면보다도 더 자주 먹게 되는 것 같다. 시판되는 맛있는 소스들을 활용하면 대충 만들어도 웬만해서는 실패하기가 힘들기도 하고, 재료가 없으면 없는 대로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간단히 만들어 먹을 수도 있고, 에너지와 시간 여유가 있을 때 곰탕 끓이듯 공을 들여 몇 끼 넉넉히 먹을 수 있는 라구소스를 만들어 두면 간단하고 맛있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면서 나름의 비법도 생기고 이제는 제법 먹을만한 파스타를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아주 오래전 파스타 맛을 잘 모르던 내가 파스타 맛에 눈을 뜰 수 있게 해준, 파스타 맛의 기준이 되어준 파스타가 있다.

2006년 겨울, 영국에서 석사를 막 마치고 동생과 유럽 도시 몇 곳을 여행을 했었다. 동생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던 때여서 백수인 우리의 여행 예산은 빠듯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겨울 비수기여서 항공권과 숙소를 꽤 저렴하게 예약할 수 있었는데,  첫 여행지가 이탈리아 베니스였다. 


여행 당일 공항으로 가는 직행 버스가 아침 출근 시간 정체와 맞물려서 공항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우리의 여행은 시작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비행기 이륙 시간이 거의 다된 시간이라 입국 수속 자체가 불가능했고, 숙소는 당일 취소하면 환불을 받을 수가 없는 예약이어서 공항에서 비싼 항공권을 다시 사든, 숙박비용을 날리고 여행을 포기하든 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기는 했지만, 계획했던 여행을 당일날 포기할 수는 없어서 그날 오후에 가는 비행기를 비싼 가격에 새로 사고, 오후까지 몇 시간을 공항에서 기다린 후에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렇게 계획했던 일정도 뒤죽박죽이 되고 컨디션도 엉망인 채로 베니스에는 밤늦게 도착을 했다. 

그런데 막상 베니스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반전 영화처럼 여러 재미있는 일들이 계속되었던 것 같다. 숙소가 있는 리도 섬에 도착하니 이미 늦은 저녁 시간이라 숙소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는데(당시만해도 스마트폰이 막 나온 시기라 맵 어플로 숙소를 찾는 다는 건 상상할 수 없던 때 였다), 적막한 밤거리에서 만난 멋진 신사는 자신의 차로(심지어 페라리!) 우리를 숙소 앞까지 데려다 주셨고, 덕분에 밤에 편하게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예약했던 가격을 생각하면 말이 안되게 훌륭했는데, 호텔에 포함되었던 조식 퀄리티가 좋아서 식비를 절약할 수 있었던 덕분에 레스토랑 식사를 할 여유도 생겼고, 우연히 찾아간 레스토랑에서 인생 파스타를 먹는 행운도 있었으니 말이다.


구글 리뷰나 맵 정보가 없던 때여서 맛집을 찾는 건 온전히 운에 맡겨야 했는데, 나름 동네 맛집 포스를 풍기는 식당을 찾아가서 메뉴 가장 상단에 있는 기본 토마토 파스타인 포모도로 파스타와 마가리타 피자를 주문했다.
먼저 피자가 나왔는데, 화덕에서 갓 구워져 나온 피자는 말이 필요 없이 맛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스파게티가 나왔는데, 테이블에 놓인 파스타의 비쥬얼은 정말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먹었었던 파스타는 해산물이나 햄 같은 재료가 풍성하고 소스도 빵을 찍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는데 , 우리 앞의 포모도로 파스타는 토마토소스가 살짝 코팅만 된 것 같은, 마치 고명 없는 허여멀건 한 비빔국수 같았다. 


초라한 비쥬얼 때문에 기대감 하나 없이 한입을 먹었는데, 잘 삶아진 탱글탱글한 면발은 적당한 온도에 딱 맞는 간의 매끄러운 토마토소스를 푹 머금고 있었다. 지금에야 그게 유화 반응이 제대로 되어서 면이 양념을 잘 머금고 표면이 매끄럽게 잘 코팅된 상태라는 걸 알지만, 그때는 도대체 내가 모르는 무슨 양념을 넣었는지, 무엇으로 간을 했는지, 초라하기 짝이 없는 파스타 면이 그렇게 맛있을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만 아는 특별한 재료(조미료)가 따로 들어간 게 아닐까?' 라는 의심을 그 후로도 한참을 했으니 그 맛의 여운이 정말 길었던 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재료도 단순하고 만드는 방법도 간단한 이 음식을 먹으면서 요즘도 종종 감탄을하곤 한다. 

생김새도 맛도 심심할 것 같지만 제대로 잘 우려낸 진한 멸치 국물에 탱글탱글하게 잘 삶아낸 면을 말아내서 파와 김 정도만 올려낸 맛있는 잔치국수를 먹었을 때도 그 비슷한 느낌을 받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멸치 국수와 포모도로 파스타 같은 단순한 음식은 온전히 기본 재료의 질과 만드는 사람의 내공으로 그 진가가 드러나는 음식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맛의 핵심은 '간(seasoning)' 을 얼마나 잘 맞췄느냐일텐데,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도 넘치거나 모자라면 과하거나 빈듯한 맛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맛에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 요리의 기본이자 핵심이 아닐까 싶다. 
단맛이 더 잘 살려면 짠맛이 필요하고 신맛 짠맛을 중화시키려면 단맛이 필요하다. 때로는 반대되는 요소들이 조화를 이뤄야 맛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동생과 나의 베니스 여행이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는 특별한 여행이 된 건 불안한 시작과 그 뒤에 이어졌던 기분 좋은 일들 때문에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절한 단맛과 짠맛이 잘 조화를 이루었던 여행이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좋은 일, 행운이 계속되면 그 좋은 정도가 갈수록 덜해지거나 이어지는 시간이 짧아진다고 하는데, 올 초 17년 만에 다시 찾은 베니스에서 오래전 그 파스타 식당을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리뷰가 좋은 식당에서 먹었던 파스타가 참 맛있었지만, 그때만큼의 감동이 없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한 것 같다.
그래서 맛도 맛이지만 실수와 시련이 있어서 즐거움, 기쁨, 행복이라는 감정이 더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파스타 한 그릇을 먹으면서 추억할 수 있도록 해준 그 한 그릇의 포모도로 파스타는 그래서 내 인생 파스타이기도 한 것 같다.


<포모도로 파스타 만들기_2인분>
준비 재료:

-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

- 파스타 200-250g (개인적으로는 두께감이 약간 있는 링귀니 면을 선호합니다.)

- 양파 반 개 

- 마늘 1-2알

- 잘 익은 토마토 2개 or 홀토마토 캔 1개

- 소금, 후추, 칠리 플레이크

- 다진 생바질 1큰술 분량

-  파마산 치즈 

- 부라타치즈(*필수는 아닙니다.)

만들기:
1. 냄비에 소금을 1스푼 정도 충분히 넣고 파스타를 삶는다. 소스를 만드는 동안 면이 다 삶아지면 면을 건져두고 면수를 2 국자 정도 따로 남겨둔다. (면 삶는 시간은 파스타 포장지에 있는 알덴테 시간으로 삶아준다.)
2. 면을 삶는 동안 소스를 만들 냄비에 오일을 1스푼을 두르고 다진 양파를 부드러워질 때까지 중불에서 3-5분 정도 볶아주다가 다진 마늘을 넣고 1분 정도 향이 날 때까지 더 볶아준다. 
3. 볶아진 양파와 마늘에 홀토마토를 넣고 볶는다. 거기에 소금(갈아놓은 파마산치즈로 간을 해도 좋다.), 후추, 약간의 칠리 플레이크를 추가로 넣고 볶다가 중 약불로 줄여 중간중간 저어주면서 15분가량 졸여주고, 다진 바질을 넣어준다. 
(생토마토를 사용할 경우 뜨거운 물에 데쳐서 껍질을 제거하고 다져서 준비)
4. 소스에 삶아진 파스타 면과 면수 한 국자를 넣고 약한 불에서 면과 소스가 잘 섞이도록 저어준다. 농도를 보고 필요한 경우 추가로 면수를 추가를 해준다. 
5. 소스가 면에 골고루 잘 코팅이 되면 완성된 파스타를 접시에 담고 파마산 치즈와 생바질을 가니쉬로 올려주고 오일도 추가로 좀 더 뿌려준다. 부라타 치즈를 올려주면 좀 더 크리미 하고 고급스러운 맛의 포모도로 파스타를 즐길 수 있다. 

17년 만에 다시 간 베니스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포모도로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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